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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취업 일기 #02. 한 달의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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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간 하고도 20여분을 자고 일어났다. 무슨 꿈을 꿨는지 몸과 머리가 잔뜩 팽창해있는 느낌이었는데 몸을 벌떡 일으켜 책상 앞에 앉으니 이런 느낌이 금세 달아났다. 어제 먹은 비빔냉면이 어제는 윗배를, 오늘은 아랫배를 쓰리게 했다. 매운 음식을 매일 먹을 때는 몰랐던 속 쓰림이 오래간만에 먹으니 선명하게 느껴졌다. 일단 배가 고프니 어제 삶아둔 냉면 사리에 콩국물을 부어 콩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찬 국수를 먹으니 몸이 추워져서 내친김에 뜨신 물로 샤워까지 해치웠다. 속 쓰림은 눈 녹듯 사라졌다.

콩국수를 먹으면서 유튜브로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버닝썬 관련 보도를 보았다. 어제 읽었던 후배의 졸업작품이 겹쳐졌다. 후배의 작품은 스트레이트 보도와 장르는 다르지만 사회 고발 측면에서 역할이 비슷하다. 어젯밤 작품을 읽고 나눈 카톡 대화에서 내가 진심으로 이 작품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코멘트를 해주었다는 게 마음속에서 인정되었다. 내 작품을 다룰 때와 다름없는 몰입과 함께. 

 

 

유튜브에서 백색소음을 틀어놓고 홍대 땡스북스에서 산 독립출판물, 구달의 『한 달의 길이』를 읽었다. 벌써 세 번째 반복해서 읽는 책이다. 크기가 손바닥만 해서 천천히 곱씹으면서 읽어도 한 시간이면 다 읽는다. 작가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보내는 한 달의 순간들이 지금의 내 미취업 상태와 겹쳐 보였다. 어느 때 읽었던 것보다 내 얘기처럼 느껴졌다.

 

8월부터 다시 목적없는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한 달은 폭염에 휩쓸려갔다. 더위가 물러난 그다음 달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해야 할 일을 한 글자도 적지 않은 빈 달력을 두 차례 찢었다.

그러나 '아무것도'라니? 그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신문을 읽고 뉴스를 시청했다. 매일 청소와 빨래를 했으며 강아지를 살뜰히 돌보았다. 이틀에 한 권꼴로 책을 읽고 열흘에 한 편꼴로 영화를 보았다. 가만히 누워 두서없는 상념에 잠겼다. 소설의 줄거리나 영화의 한 장면을 곱씹거나 반려견 빌보의 작은 행동을 관찰했다. 허무하게 날려먹었다고 생각한 하루하루는 사실 꽤 바쁘게 흘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한 푼도 벌지 않았을 뿐이다. 시간을 소비한 대가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았을 뿐이다.
요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여덟 시간. 보통 새벽 2시쯤 잠들어 오전 10시에 깬다. 눈 뜨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강아지 쓰다듬기. 따뜻한 털을 규칙적으로 쓰다듬다 보면 때로 눈꺼풀이 스스륵 감기는데, 그런 날에는 하루 열 시간이고 열두 시간이고 늘어져 자버린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12시에 이불을 찼다. 맙소사 벌써 정오라니. 꼭 해야 할 일도 없으면서 잠결에 날린 시간을 아까워하며 부리나케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하루를 공쳤다. 하루 일과를 줄줄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는데, 오늘 한 일을 기록하고 보니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 종일 바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무노동의 반대편에는 무수히 많은 자발적인 노동이 있다. 공공도서관이 운영될 수 있도록 지방세를 납부하는 서울 시민들이 있고, 일하는 와중에 짬을 내어 동생에게 커피 한 잔을 보내는 8년차 직장인이 있다. 공짜로 빌린 책과 공짜로 마신 커피가 사실상 공짜가 아니며, 커피를 다 마시고 돌아갈 안락한 보금자리 역시 부모님이 노동으로 그 값을 치른 것이라는 사실이 내가 선택한 무노동과 과연 양립할 수 있을지. 그런 생각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백수가 집에서 보내는 하루 일과는 누구나 비슷한가보다. 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특히 라면), 집안일 하고,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고, 무언가를 읽거나 끄적거리고, 반려동물과 노닥거린다. 구달 작가는 나에 비해 피로가 많이 누적돼있는 상태라는 점, 작가는 강아지를 쓰다듬지만 나는 고양이를 쓰다듬는다는 점 정도만 다르고, 늘어지는 하루를 보내며 자아 성찰하는 대목은 거의 내 일기장 수준이었다.

다만, 의아했던 것은 이렇게나 환경이나 생명에 대해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육식에 대해선 아무런 거리낌없다는 점이었다. 동물실험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비글들이나 길 한복판에 몸통이 꺾여 죽어있는 쥐에 대해선 연민을 느끼면서 고기를 먹을 때는 아무 문제의식이 없는 건지 말이다. "쥐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연대해야할 동료일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돈가스 집을 찾고 몸보신을 위해 한우갈비탕을 먹는다. 소나 돼지는 동물이 아닌가? 인간은 나보다 작고 귀여운 동물만 품을 수 있는 걸까? 원래 생각없이 살면서 마구잡이로 육식을 해대는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이렇게 감수성이 예민하고 빼어난 글을 쓰기까지 하는 사람이 육식에는 철저히 무감한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작가가 모순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문명 사회에 살면서 완벽할 수 없고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정도 차이가 있다. 나 역시 오래도록 동물은 동물이고 고기는 고기라고 여겼고, 지금도 100% 완벽한 비건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 그냥, 이런 이야기가 너무나 현실적이고 흔해서 서글플 뿐이다.

 

△ 점심으로 먹은 비빔냉면

 

책 한 권을 금방 해치우고 나서 어제오늘 그렇게 내 속이 쓰리게 했던 비빔냉면을 또 해 먹고 말았다. 오늘 거는 어제 거보다 정성이 더 들어갔다. 다진 마늘, 쪽파, 간 아마씨를 추가했더니 맛이 더 풍부하고 좋아졌다. 면을 넉넉히 삶아놔서 내일도 또 먹어야 할 것 같은 예감. 자극적인 양념과 정제 탄수화물 때문에 애써 가라앉힌 피부 트러블이 또다시 도질까봐 비타민A를 한 알을 먹어두었다.

 

△ 이천 원 주고 산 포도 두 송이. 깜짝 놀랄만큼 달고 맛있었다.

 

해 지기 전에 나가서 조금이라도 밖에서 걷고 싶어서 마트에 들렀다. 더 사고 싶은 게 많았지만 당장 필요한 하수구 용해제랑 포도만 딱 구입했다. 수입이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 긴축 재정을 유지해야 한다.

 

*오늘 쓴 돈

펑크린 4,300
포도 두 송이 2,000
합계 6,300

 

드디어 오늘 원고 편집 테스트 원고가 왔다. 첫 작업이라 한 40분 정도 들여서 수정하고 편집본을 보냈다. 건당 페이가 2천 원인 줄 알고 딱 그 정도 노동력만 들여야지 하면서 썼는데 다시 확인해보니 5천 원이었다. 들인 시간과 결과물을 봤을 때 5천 원은 충분히 받을만했다(내가 이 분야에서 나름 고급인력이라는 점은 잠시 잊어야지). 페이가 적긴 하지만 출퇴근하는 일은 화장해야지, 옷 입어야지, 교통비 써야지, 귀갓길에 간식 사 먹어야지 은근히 나가는 돈이 많은데, 집에서 하는 일은 그런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득이다. 지금 생각으론 아무리 못해도 하루에 네다섯 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교정, 교열은 내 적성에 딱 맞는 일이라 조금도 힘들지가 않다. 다만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질까 봐 걱정이다. 40분 일하고 20분 쉬는 원칙을 철저히 해야 건강도 유지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 이참에 아예 한국어능력시험을 따버릴까 싶다. 불필요한 자격증 순위에서 본 것 같아서 준비하려다 말았었다. 내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시간적, 금전적 여유를 확보하고 싶다. 절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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