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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취업 일기 #01. 3일 만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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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아파트 담장에 예쁘게 피어있던 장미꽃

 

 

돈을 쓰지 않는 것 외에는 가난과의 싸움에서 이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작가들은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밖에 나가고 싶어서 근질근질했던 3일이 지났다. 밖에 나가면 돈을 써야 하고, 돈을 쓰면 알바를 뛰어야 하니까. 내 시간을 확보하고 싶어서 당분간 집 안에 붙어있기로 했었다. 나가서 산책 정도는 했을 법 한데 일단 나갔다 하면 참외라도 만 원어치 사들고 올 게 뻔해서 요가매트 위에서 몸을 푸는 걸로 만족했다. 노트북 앞에서 둥글게 굽었던 몸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지만 하루에 만 보씩 걸을 때의 드넓은 공간감, 그 위에서 길러지는 지구력만큼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8시간 푹 자고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머리를 이틀 만에 감아서인지 진작 탈락됐었어야 할 머리카락들이 죽죽 빠졌다. 그 사이 안 씻긴 했구나... 샤워를 마치고 나니 기분이 상쾌했다. 드디어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는 이 방법에 확신이 든다. 아침을 온수 샤워로 시작한 날은 평소보다 더 의욕적이게 된다는 것을. 대청소를 할 마음이 생겼다. 밀린 빨래도 하고, 싱크대도 정리하고, 쓰레기도 내다 버리고.

 

베란다 창문과 현관문을 동시에 열어두니 맞바람이 들었다. 에어컨 바람과는 비교도 안 될 깨끗하고 시원한 바람이었다. 고양이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즐길 수 있었는데, 안전장치 없이 현관문을 열어두는 일은 나에게도 긴장감을 주고 고양이에게도 그런 것 같다. 문을 열면 고양이는 복도에서 나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커튼 뒤에 숨는 등 안절부절못하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야 적응하곤 한다. 아무래도 내 심리나 태도에 조금은 영향을 받는 것 같다. 그래서 길게는 못 열어둔다.

 

 

△ 게으른 비건이 대충 해먹는 한 끼 식사

 

오늘은 기필코 외출하겠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한 일주일은 집 안에만 콕 박혀서 글 써야지 벼르다가 쓰레기 버리러 나가보니 날씨가 환상적으로 좋았던 것이다. 햇볕은 강하지만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맑은 날씨... 하늘도 새파랬다. 일단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장 점심부터 챙겨 먹었다. 대접에 현미쌀과 현미찹쌀을 1:1로 섞어서 지은 밥을 넣고 엄마가 보내준 텃밭 채소를 손에 잡히는 대로 싹둑싹둑 잘라 넣고 간장, 들기름을 한 숟갈씩 넣어 생채소 비빔밥을 해 먹었다. 베란다에서 상해 가고 있던 오렌지도 더 늦기 전에 먹어치웠다.

 

밖에 나가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햇볕을 쬐서 그런지 기분이 들떴다. 이러려고 야구모자 정도만 쓰고 자외선 차단제는 안 바르고 나왔다. 길가에 핀 들꽃도 너무 예쁘고 벌들도 한창 일할 때라 많이 보였다. 5월이 좋긴 좋구나. 모처럼 이렇다 할 고민 걱정 없이 가벼운 산책을 즐겼던 것 같다. 취업 좀 늦으면 어때. 지금 내가 행복하면 된 거지 뭐. 철없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난 내 인생을 사랑하니까 꼭 나만의 길을 찾을 거다. 당분간 적게 벌고 적게 쓰면 어떻게든 되겠지.

 

집에서 만드는 콩국수에 곁들여 먹을 배추 겉절이랑 오이도 사고, 코인 노래방 가서 노래도 부르고. 요 며칠 먹고 싶었던 참외도 싸게 잘 샀다. 과일 가게에서 낮잠 자고 있던 깡마른 새끼 고양이도 쓰다듬었다. 

 

 

*오늘의 지출 

반찬가게 겉절이 3,000
삼다수 430
오이 3개 990
레토르트 비빔냉면 5,500
코인노래방 2,000
참외 7개 5,000
합계 16,920

 

 

요 며칠 벼르던 것에만 딱 쓰고 돌아왔으니 만족스럽다. 집으로 돌아와서 비빔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동봉되어있던 양념장이 너무 맛있게 매운 탓에 속이 쓰렸다. 가공식품도 좀 끊어야 하는데 면요리 덕후가 여름에 면을 안 먹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술, 담배, 커피 등 어느 것에도 중독되어있지 않다는데 나름의 자부심이 있지만, 면 중독이 아니냐고 하면 아니라곤 못할 거 같다. 피부 트러블 때문에라도 정제 탄수화물은 끊어야 하는데. 자극적인 양념도 마찬가지고.

 

 

△  하나로마트에서 산 청수비빔냉면. 면만 잘 삶으면 무조건 맛있다.

 

남은 오후 시간에는 대학 후배의 졸업작품을 읽고 코멘트해주기로 했다. 내 나름의 성의를 다해 프린터로 인쇄해서 보려고 한다. 알바몬에 지원해두었던 원고 편집 알바는 떨어졌나 보다 하고 있었는데 오늘 연락이 와서 샘플을 보내주신다고 했다. 만약 하게 되면 여기에 후기를 적어볼 예정이다.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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