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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구직활동지원금 받고 5개월 만에 취업 성공한 후기(※장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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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개월 동안 청년구직활동지원금(이하 구활금)을 받았다. 두 번인가 거절 당하고 세 번 만에  '적합'이 뜬 것이다. 원래 있던 우선순위가 없어지고 누구나 지원받을 수 있도록 자격 요건이 완화된 덕분이었다. 구활금을 신청할 당시의 나는 하고 싶은 일하고 살아보겠다고 글도 쓰고 공부도 하고 틈틈이 일일 알바를 뛰며 생계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을 다니느니 알바를 전전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알바는 생각보다 더 돈이 안 됐고 언제든 일정이 잡히면 튀어나가야 했기에 불규칙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단기간에 강도 높은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까지 있었다. 불확실한 신분으로 어디 가서 나를 소개하기가 막막했고 한 치 앞의 미래조차 뜻대로 설계할 수 없었다. 집중해서 공부하다가도 수시로 알바 사이트를 뒤져야만 했다. 알바몬 뒤지는 데 들인 시간으로 자격증 한 두 개 정도는 딸 수 있었을 거다.

 

 

학부시절에는 취준이 길어지면 인맥이 끊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막상 취준 비슷한 걸 오래 겪어보니 사람 만나는 것은 물론 밖에 나가는 일 자체가 부담이고 죄책감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혼자가 돼 있었고 나를 불러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 모든 게 스스로 자처한 결과였다는 게 놀라웠다.

 

 

이런 시기에 구활금을 받게 되었다. 월 50만 포인트를 받는 대신에 하던 알바는 그만둬야 했다. 알바는 주 20시간으로 제한돼있는데 그 조건에 맞는 일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주 20시간 제한이 있는 탓에 아무 알바나 할 수 없다는 게 구활금의 유일한 단점인 것 같다). 내가 주로 하던 알바는 마트 판촉 행사여서 행사 일정을 전부 소화할 수 있어야했는데 행사 한 번에 주 20시간은 우습게 넘겨서 구활금을 포기하든, 알바를 포기하든 해야 했다. 구활금을 포기한다는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일부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졌을 만큼 절박했다. 

 

 

알바 자리 하나 찾기가 어찌나 어렵던지.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력서 넣는 족족 다 돼서 나는 무조건 합격하는 사람이구나 우쭐해했던 시기도 있었는데, 지나고보니 완벽한 착각이었다. 이제는 나이가 차고 전공 경험 등이 쌓이다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도 좁아져있었다(전문성이 늘 수록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줄어드는 아이러니란.).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도 경쟁이 말도 안 되게 치열하다. 취업도 안 되고 알바도 안 구해지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러다 보니 전혀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이상한 회사도 일단 넣고 보는 식이었다. 지금도 내 이력서의 행방을 일일이 헤아리지 못한다. 학부 때는 쳐다도 안 봤을 회사에서조차 연락이 오지 않을 때의 기분이란. 기업 입장에서도 내가 눈에 차지 않았겠지만 내 눈에 차는 기업도 몇 없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가고싶은 대학교도 딱 한 군데 뿐이었는데 그 학교 아니면 대입을 포기하겠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재수 끝에 기어이 입학허가를 받아내 또 한번 놀라게 만들긴 했지만. 그 정도로 취업에 있어서는 매우 불리한 기질의 소유자였다. 기준도 높고 좀처럼 타협도 없는. 결과적으로 나의 이러한 기질이 원하던 형태의 기업으로 취업을 가능하게 했다. 

 

 

구활금 받는 동안에는 포인트를 최대한 아껴 쓰면서 거기에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포인트로 공과금 같은 건 낼 수 없어서 엄마한테 돈을 빌려야 했다. 돈이 떨어져갈 때마다 우울감이 극심해졌고 자기 밥벌이도 못하고 사는 자신이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돈 대신 시간을 벌고자 했던 건데 결국 돈 때문에 어렵게 확보한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없었다. 블로그에 익명으로 글을 쓰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아마 엄마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내가 이 세상에 없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30~40%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하는 이야기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왜 그게 안 될까 의문이었다. 과거에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반추적 사고를 많이 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매일 매일이 그랬다.

 

 

평범하게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그저 대단해 보였다. 나름의 크고 작은 고충들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일은 어디 가서 뭐하지가 매일 밤 고민이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어디든 갈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면 구활금 카드를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 틈에 섞여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생산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아니, 거의 늘 집 밖으로 나가는 편이 좋았다. 구활금으로 헬스클럽은 등록이 안 되는데(관련분야 취업 등 확실한 이유가 있는 경우 가능) 요가학원은 등록할 수 있었다. 구활금을 이용하기에는 약간 갈등되는─여기에 써도 되나? 싶은─종목이었지만 요가는 실로 내 암울한 취준 생활의 빛이자 구원이었다. 

 

 

구활금 카드로 맨 처음 산 것은 면접 때 입을 만 몇천 원짜리 블라우스였다. 떨리는 첫 구매였고 아무리 면접용이라지만 옷을 산다는 데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기억에 남는다. 그 뒤로 토익 시험도 보고, 학원도 등록하고, 핸드폰 요금도 냈다. 구활금의 대부분은 식비를 비롯한 생활비로 사용했다. 병원비로도 활용했다. 몇 년째 목이랑 어깨가 아팠는데 도수치료 10회 만에 거북목 직전에서 정상 커브로 돌아왔다. 비뚤어진 골격이 제자리로 돌아오니 정신적으로도 많이 편안해졌다. 내 나름대로 꼭 필요한 데에 쓰고 있다 해도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서 낸 세금으로 받은 돈이라 쓸 때마다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그래도 취업이 어려운 게 내 잘못만은 아니니까 가능한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나 자신을 구하고 돌보는 일이 결국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구활금을 받으려면 매달 20일까지 구직활동보고서를 내야 해서 어떻게든 구직활동은 해야 했다. 직장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매일 아침 지옥같은 출근길을 나서는 것처럼 나 역시 무너져가는 마음을 다잡으며 이력서를 뿌리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구직활동이란 무수한 거절과 무반응에 익숙해지는 일 자체였다. 그래도 나라가 이렇게 지원해주고 엄마도 믿고 기다려주고 있으니 힘을 내야만 했다. 취업을 위해 구활금의 도움을 받는다기보다 구활금의 도움으로 취업할 기운을 낼 수 있었달까? 그 정도로 자존감이 수시로 깎여나가고 무기력한 상태가 반복적으로 찾아왔다. 그런 내게 구활금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됐다. 하던 거 계속 해보라고 말 없이 등 두드려주는.

 

 

결론적으로 구활금을 받은 지 5개월 만에 취업에 성공했다. 심지어 괜찮은 두 군데에서 동시에 합격 통보가 와서 어렵게 골라서 들어갔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서류 합격 연락을 받았다. 그동안 면접 봐온 곳들 중에 근무 조건이 가장 좋다. 어디 굉장한 데 취직했나보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는 않다. 내가 기업을 보는 기준은 사회적 기준과는 다소 동떨어져있다. 남들 눈에 번듯해보이는 직장 물론 좋지만 그보다는 기업 비전, 대표의 마인드가 내 가치관과 부합하는지를 본다. 그래서 환경분야 사회적기업을 선택했다. 계약직 인턴이고 월 급여는 세전 200만원. 세금 떼면 180만원 정도 된다. 9시부터 6시까지 일하고 집에 도착하면 6시 반에서 7시 정도. 주말, 공휴일은 쉬고 사회적 기업인 만큼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는 부당한 업무지시 같은 건 없다. 난 이만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많은 실패의 과정에서 얻은 조각들로 지금의 퍼즐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 기함할 정도였는데, 그 모든 과정들이 작은 톱니바퀴처럼 미세하게 방향을 틀어서 지금 이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이게 무언가 이루어지는 방식이구나. 방황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작은 성취조차 내 마음을 부풀게 만드는 것 같다. 엄마가 엄청 기뻐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이제 시작이라며 두고 봐야 한다는 듯 담담한 반응이었다. 나 역시 그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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