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 면접후기] 방송작가는 좋은 직업일까?
방송작가 면접을 보고 온지는 몇 주쯤 됐다. 같은 시기에 본 여러 면접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면접이었다. 그 때의 경험을 글로 정리하며 방송작가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고려해볼 만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는 이번 면접을 끝으로 더 이상 방송작가 면접을 보지 않기로 했다.
내가 면접을 본 곳은 지상파 방송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여러 외주 프로덕션 중 한 곳이었다. 면접은 작가님과 PD님 한 분 씩해서, 2대1로 진행되었다.
면접 전날에 전화로 작가님과 사전 인터뷰가 있었다. 귀갓길에 예고없이 걸려온 심층면접이었다. 갑작스레 이루어지긴 했지만 내가 제출한 서류를 꼼꼼하게 읽어보고 질문해주셔서 답하기가 좋았고 지원자에 대한 관심과 성의가 전화기 너머로까지 느껴져서 솔직히 좀 신이 난 상태로 질의응답을 했던 것 같다. 모처럼 멀쩡한(?) 데 지원했구나 싶어 면접에도 기꺼이 응할 수 있었다.
전화에서 받은 좋은 인상은 면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가님도 PD님도 좋은 분들인 것 같았다. 이 분들과 같이 일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작가님은 내게 여러차례 반복해서 물으셨다. 이 일을 해도 정말 괜찮겠냐고. 하다하다 이런 일까지 해야되나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고. 희망연봉에 한참 못 미치는 데 괜찮은지도. 심지어 이 대학(내 출신학교) 나와서 이런 일 하면 부모님이 너무 속상해하지 않으시겠냐고까지 하셨다. 내 동기들은 어디서 무슨 일 하고 있는지도 물어보셨고 그들과 비교하는 마음 때문에 내가 자존심 상할 것을 우려하셨다.
듣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거지? 방송작가가 뭐 어때서...?
듣자하니 여기서 막내작가가 하는 일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 하루에 섭외 연락을 수백 통 씩 돌리고 그밖에 여러 잡다한 일을 해야한다고 한다. 익히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커피 심부름부터 시작할 각오 쯤은 돼있었다.
나는 그동안 알바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라고, 뭘 걱정하시는지 알겠으나 그럴 일 없다고 내 나름대로 어필해봤지만 작가님한테는 씨알도 안 먹히는 느낌이었다. 그냥 내 이력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고 작가님은 그걸 바탕으로 앞날을 짐작하셨다. 내가 쌓아온 이력은 극복할 수 없는 편견이었다.
게다가 나는 올해 서른 살이 되어 막내작가로 들어가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작가님도 이 부분을 걱정하셨다. 내 나이 정도면 벌써 메인작가로 활동하고 있을 나이이고, 실제로 많은 메인작가들이 내 나이정도 된다고 한다.
아마 내가 이번 면접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늦었다'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들을 때마다 새롭고 가슴에 폭폭 박힌다. 넌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다…
'다 자기 시간표대로 사는 거지 인생에서 늦은 게 어딨어?'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었다. 내가 발을 담그려는 세계에서 나는 확실히 늦은 존재였고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면접 중에도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했다. '나에게 늦었다고 말하는 집단에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력서에 한 줄로 정리되지 않는 이른바 공백기도 내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완충기였지만 사회에서는 그저 우유부단함의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할 뿐이었다.
방송작가는 왜 나이가 중요할까? 이쪽 일은 무조건 밑바닥부터 시작해서인지 어딜가나 능력보다는 나이를 요구하는 분위기다. 방송작가는 더없이 창조적인 직업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나이를 바탕으로한 위계질서가 철저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반말과 쌍욕이 난무하는 거친 바닥에서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기 위해선 나이라도 어려야하는 걸까? 여기에서 방송작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보수적인 집단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눈치 안 보고 막 부릴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 같은 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방송작가는 대부분 여자다. 남자 방송작가가 있기는 한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이 한국에서 여초현상이 심한 직업은 좋은 직업이 아닌 경우가 많다. 반면에 PD는 남자가 많다. PD는 방송국에서 공채로 뽑는데 80%가 남성이다. 방송작가는 죄다 아웃소싱이고 월급도 최저임금 받으면 다행인 수준이다. 나는 이런 구조 자체에 의문이 든다.
그래도 입봉하고 나면 사정이 좀 나아진다는 점이 희망적이다. 서브작가를 거쳐 메인작가쯤 되면 급여도 PD 못지 않게 받는 것 같다. 하지만 직급이 높아져도 안정성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인맥과 능력을 총동원해가며 끊임없이 경쟁해야 한다. 방송작가는 막내, 서브작가를 거쳐 메인작가가 최상위고 이후엔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겨가는 식이다. 반면에 PD는 CP, 국장 등으로 진급할 수 있다. 내가 가진 모든 체력과 창조성은 방송을 위해 바치지만 나의 공은 방송국과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PD에게로 돌아간다. 나는 살면서 수많은 TV 프로그램을 봐왔고 감동받았지만 프로그램에 기여한 단 한명의 방송작가의 이름도 알지 못한다. 연예인이 방송에서 이름을 언급해주거나 외모나 언행이 연예인만큼 튀지 않는 이상 존재를 알기 어렵다. 이번 면접을 진행한 작가님의 경우에도 프로그램 홈페이지에서조차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같은 방송작가로 분류되지만 드라마작가와는 위상이 많이 다른 것 같다. 방송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이 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꼭 유명해질 수 있어야 좋은 직업인 건 아니지만 같은 직군에 있는 직업들과 적잖이 차이가 난다.
나는 정말 시키는 거 다 해볼 각오가 돼있었는데 그 쪽 세계에서 보기엔 영 아니었나보다. 살다보면 남들 시선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다. 나에게 늦었다고 말하는 집단에서 행복할 자신이 없다. 그런 곳에서 내가 가진 능력을 온전히 펼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 같다. 애초부터 규격에 맞지 않는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불규칙한 생활을 할 자신이 없어서 방송작가를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로 깨끗이 마음을 정리했다. 뭐, 이렇게 하나 하나 엑스표를 쳐나가는 일도 나에게 딱 맞는 무언가에 다가가는 과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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