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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더 와닿는 제레미 리프킨의『엔트로피』개념정리, 문장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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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지식과 기술이 축적됨에 따라 세계는 더욱 가치있는 방향으로 전진해간다고 믿는다. 우리는 또한 개인은 독립된 완결체로서 존재하며, 자연에는 질서가 있고 과학적 관찰은 객관적이며, 인간은 항상 사유재산을 추구해왔고, 개인간 경쟁은 항상 있어왔다고 믿는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며 따라서 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중략) 우리는 아직도 17세기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관(→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교육을 통해 상식이라고 믿게 된 기존의 세계관, 엔트로피 법칙의 반대개념)의 영향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열역학 제2법칙이다. 1법칙은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며, 따라서 창조될 수도 없다고 가르친다. 단지 그 형태만 바뀔 뿐이다. 제2법칙(엔트로피 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고 규정한다. 즉,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획득가능한 상태에서 획득불가능한 상태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만 변한다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지구상이건 우주건 어디건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더 큰 무질서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로마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세계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엎질러진 물이다", "자연의 법칙을 이길 수는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방금 말한 이야기를 자주 들어보았고 이러한 이야기가 일상생활에서 거듭 증명되는 것을 본 사람은 제1법칙과 제2법칙을 벌써 알고 있는 사람이다.

 

 

"열역학"이라고 하면 매우 복잡한 개념처럼 들린다. 그러나 사실 열역학은 우리가 아는 과학개념 중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놀라운 것이다.
제1법칙과 제2법칙을 합쳐서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제1법칙), 엔트로피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제2법칙).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에너지는 창조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여기에 성공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에너지를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꾸는 일 뿐이다. 모든 것이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형태, 모습, 운동은 에너지를 여러모로 집중변화시킨 결과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인간, 초고층 빌딩, 자동차, 풀 한 포기 등은 모두 에너지가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초고층 빌딩이 세워지거나 풀 한 포기가 자랄 때 이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에너지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초고층 빌딩이 허물어지고 풀 한 포기가 죽어도 이들에 의해
형태가 부여된 에너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에너지는 어딘가로 옮겨졌을 뿐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을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단 한번의 숨쉬기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숨을 들이쉬는 순간 우리는 한때 플라톤이 호흡했던 공기의 분자 5,000만 개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더 이상 일로 전환될 수 없는 에너지의 양을 측정하는 수단이다. 엔트로피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은 독일의 루돌프 클라우지우스였다. 그러나 엔트로피와 관련된 법칙이 처음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41년 전, 프랑스의 젊은 육군장교 사디 카르노에 의해서였다. 카르노는 증기기관의 원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증기기관의 한쪽은 매우 뜨겁고 한쪽은 매우 차갑기 때문에 증기기관이 일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달리 말하면 에너지가 일로 전환되려면 시스템의 각 부분에 에너지의 집중도 차이(즉 온도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이 발생하는 것은 에너지가 높은 수준의 집중도에서 낮은 수준으로 (또는 고온에서 저온으로) 이동할 때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에너지가 어떤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그 다음 일을 수행할 유용한 에너지의 양이 줄어든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댐에서 나온 물은 저수지로 떨어지면서 전력을 발생시키거나 물레방아를 돌리거나 아니면 다른 쓸모있는 일을 한다. 그러나 일단 바닥에 닿으면 물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 평평한 바닥에 있는 물은 아주 작은 물레방아조차 돌릴 수 없다. 이 두 상태는 유용한 또는 자유로운 엔진 상태와 무용한 또는 구속된 에너지 상태로 불린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유용한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일정량의 에너지가 무용한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뜻이다. 무용한 에너지는 결국 오염이 된다. 사람들은 오염이 생산활동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오염이란 것은 무용한 에너지로 전환된 유용한 에너지의 총량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쓰레기란 흩어진 형태의 에너지이다. 제1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창조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단지 전환될 뿐이며, 제2법칙에 의해 한 방향으로만(혼돈과 무질서를 향하여) 변화해가므로 오염이란 엔트로피의 또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달리 말하면 엔트로피란 어떤 시스템 내에 존재하는 무용한 에너지의 총량을 나타낸다. 

 

 

 

뜨거운 부지깽이를 공기 중에 놓아두면 부지깽이는 점점 식고 주변 공기는 따뜻해진다. 이것은 열이 뜨거운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부지깽이를 만질 수 있게 된다. 주변의 공기도 만질 수 있게 된다. 둘은 같은 온도에 도달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평형상태라고 부른다. 평형상태에서는 에너지 수준 차이가 없어진다. 이것은 물이 평평한 바닥에 있는 상태와도 같다. 식어버린 부지깽이나 바닥의 물은 더 이상 유용한 일을 할 수 없다. 이때 이들의 에너지는 구속된 에너지이며, 무용한 에너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수지 바닥의 물이 댐 위로 다시 올라갈 수 없거나 부지깽이가 다시 달구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럴 때마다 자유롭고 유용한 에너지원이 소비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클라우지우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열역학 2법칙을 요약했다. "엔트로피는(무용한 에너지의 총량)는 극대점을 향해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지구상의 에너지원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간의 시간 단위로 재생가능한 것이고, 하나는 지질학적 시간 단위로만 재생가능해서 인간에게는 사실상 재생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지구 자체의 저엔트로피의 원천은 에너지와 물질로 분리될 수 있다. 지구 자체의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의 양은 한정되어 있고, 지구 자체의 재생가능한 에너지원도 총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고갈될 때까지 소비하면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과 같아진다. 태양 에너지도 총량에 있어서 무한하지만 지구에 도달하는 비율과 형태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고립된 시간과 장소에서 엔트로피 과정을 역행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다른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전체 환경의 엔트로피 총량은 증가한다. 이러한 사실은 재생과정에서 특히 중요하다. 사람들은 적절한 기술만 개발하면 우리가 소모해버리는 것을 거의 모두 재생하여 재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앞으로 지구의 경제적 생존에 있어서 좀더 효과적인 재생이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100% 가까운 재생률을 이룰 방법은 없다. 예를 들어 오늘날 금속의 재생효율은 30% 정도이다. 재생을 위해서는 재생대상을 수거하고, 수송하고 가공하는 데 별도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결국 환경 전체의 엔트로피 총량이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재생이라는 것은 유용한 에너지원을 희생하고 전체 환경의 엔트로피 총량을 증대시키는 대가를 치러야만 가능하다.

 

 

 

가끔 운석이 떨어지거나 우주진이 낙하하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 지구는 우주 속에 존재하는 폐쇄된 시스템이다. 태양에너지를 유입하여 물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경제학자 니콜라스 죠스제르크-레겐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우주라는 거대한 용광로조차도 에너지만으로는 충분한 양의 물질을 만들어낼 수 없다. 오히려 엄청난 양의 물질이 계속 에너지로 전환되고 있다." 지구의 껍질을 구성하는 한정된 양의 물질도 끊임없이 소진되고 있다. 매순간 산은 침식되고 표토는 깎여나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궁극적으로 재생가능한 자원도 사실은 재생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생물체는 계속 번식하면서 태어나고 죽는다. 이 과정에서 지구의 엔트로피가 늘어난다. 결국 미래의 생명체에게 유용한 물질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다. 농부라면 누구나 끊임없는 재생작용과 햇빛으로도 같은 땅에서 매년 같은 양의 풀을 영원히 자라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 존재하는 풀 한포기는 같은 자리에서 미래의 풀 한포기가 덜 나온다는 것을 뜻한다.

 

 

 

에너지 수준과 엔트로피를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관점은 '집중도'이다. 왜 향수병을 열면 향기가 병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해서 결국 방안을 가득 채우게 되는 것일까? 방문을 열면 몇 분 후 거실에서도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버트란트 러셀은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장소에 많은 양의 에너지가 있고 인접한 장소에는 매우 적은 에너지가 있을 경우 에너지는 항상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평형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동한다. 이 현상은 "민주화를 향한 경향"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니콜라스 죠스제르크-레겐은 좀더 직접적으로 핵심에 다가간다. 그의 말은 길지만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통계적 열역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기계론적 패러다임과 이제 부상하는 엔트로피 패러다임 사이의 싸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인들이 통계적 역학, 더 정확히 말해 통계적 열역학으로 알려진 새로운 과학을 통해 물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를 그대로 믿도록 오도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통계적 열역학이라는 분야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여러 가지 반대증거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이 아직도 맹목적으로 운동을 구성하는 사실에만 매달려있다는 증거이다. 이로 인해 나타난 증상이 바로 볼츠만의 비극적 투쟁이다. 볼츠만은 경직된 역학법칙으로 확률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 불확실성과 뒤얽힌 열역학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 새로운 학문분야에 따르면 한 줌의 재로 보일러를 데울 수 있다. 그리고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 처음 살았던 삶의 역순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 확률이 지극히 낮을 뿐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우리가 그런 '기적'을 아직 보지 못한 것은 우리가 충분한 수의 잿더미와 시체를 관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둘러봐도 알 수 있다. 그냥 내버려두면 어느 것도 저절로 더욱 질서있는 상태로 옮겨가지 않는다. 집을 관리하거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알 것이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그냥 내버려두면 점점 더 무질서해진다. 이것을 질서있는 상태로 되돌리려면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카드 한 장 한 장을 숫자와 그림에 맞추어 질서있게 쌓아놓았다고 하자. 이 카드 뭉치는 질서의 최대값, 또는 엔트로피의 최소값에 있다. 이 카드 뭉치를 방바닥에 던지면 무질서한 상태로 흩어질 것이다. 카드 한 장 한 장을 집어 처음처럼 질서있는 상태로 쌓아올리려면 카드를 뿌릴 때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한 곳에서 엔트로피 증가를 역행시키려면 다른 곳에서 엔트로피를 증가시켜야 하기 때문에 결국 주변환경의 전체 엔트로피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어느 정도의 에너지가 소실되며, 따라서 미래에는 결코 쓸 수 없는 무용한 상태로 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의 여러 법칙 중 최고의 법칙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본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어떤 이론은 전제가 단순할수록, 그것이 관계된 대상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적용범위가 넓을수록 뛰어난 이론이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열역학이야말로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이론이다. 이것은 내가 확신을 가지고 믿을 수 있는 보편성있는 물리학 이론 중 유일한 것이며, 적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그 기본 개념이 결코 도전받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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