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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긴급재난지원금을 기부하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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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재난지원금을 기부할지 말지를 두고 고민했을 것 같다.

나는 첫날인 어제 신청 절차를 마쳤고, 기부하지 않았다.


내가 교복을 입기 시작할 무렵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우리 집은 기초생활수급대상이었다.

동사무소에서 종이 급식 쿠폰이 나왔다.

그걸 들고 가까운 김밥집이나 죽집에 가서 밥을 사다 끼니를 때웠다.

밥 사 오는 일을 삼 남매가 돌아가면서 했다.

나도 어려워하고 동생들도 힘들어하는 일이었기에.

한 살이라도 어리면 귀엽게라도 봐줄까 동생들에게 떠맡기려고도 했었다.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고 주눅이 들었다.

 

식당 앞을 행인인 척 두어 차례 지나치며 유리벽 너머를 흘끗 들여다보았다.

현금을 쥐고있을 때처럼 한 번에 들어가질 못했다.

직원이 여자 분인지 남자분인지, 안색은 어때 보이는지, 안에 손님은 몇 명이나 있고 너무 바쁘지는 않은지를 봐가며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다 적당한 타이밍을 잡아 들어갔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과정이었지만 사 가지고 나올 때만큼은 후련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종이 쿠폰이 가난의 표식임을.

나는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렸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밥이 나오는 걸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무상급식 논란이 한창일 때 적극 찬성을 외쳤던 나는 지금의 학생들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내 고등학교 시절 기억은 대부분 블랙아웃되었지만, 책상 위에 무심히 놓여있던 급식비 미납 통지문을 반 친구들이 볼까 황급히 서랍 속에 숨긴 그 찰나의 순간을 기억한다.

왜 수치심의 기억은 유독 깊고 날카로울까.


우리나라 국민들은 특히 윗세대일수록 보편적 복지 개념이 낯설 수밖에 없다.

전 국민이 한 명도 빠짐없이 현금성 지원을 받는 경험도 이번이 처음이다.

절박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선별'되지 않고 여러 사람들 틈에 섞이어 꼭 필요한 도움을 받아갈 수 있다.

모든 소비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재난지원금을 받는 모든 국민들이 만들어내는 소비행위가 이번 정책의 방법론과 필요성에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길 기대한다.

복지 대상자를 선별하는데 드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아껴서 모두가 이로운 방향으로 더 쓰일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으면 한다.


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한테까지 지원금을 줘야 하는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난지원금이 조금도 아쉽지 않을만큼 넉넉한 사람들도 있다.

기부 채널은 정부가 그런 사람들의 입장까지 고려해 열어둔 방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긴급재난지원금의 일부 혹은 전부를 기부하는 분들께 존경을 표한다.

또한 이번 정책을 환영하고 지지하며 기부 없이 다 받아 쓸 계획인 분들께도 똑같이 존경을 표한다.

재난지원금을 본래 목적에 맞게 남김없이 사용하는 것만으로 모두의 안녕을 위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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