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서 통증 느낀 새해 첫 책,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이 책의 존재는 처음 나왔을 즈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아우라(?)때문에 집어 들지 못했었다.
아니, 내 기억이 맞다면 몇 차례 집어들었다가 놓았을 것이다.
그러다 별안간 12월 30일에 긴 연휴를 앞두고 갑자기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구해다가
31일은 건너뛰고, 새 해 첫 날인 오늘에서야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뭔가 선택해야 할 때 주로 직감에 의존하는 내게 딱히 이유랄 것도 없었다.
사람과의 인연처럼 책과의 인연도 다 적당한 때가 있는 모양이다.
목차를 쭉 보다가 특별히 흥미로운 파트가 몇 개 있어서 그 부분 먼저 읽을까 하다가
그냥 평소처럼 머릿말부터 해서 앞부분부터 쭉 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그야말로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빠져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몸의 어디라고 짚어내기 힘든 부위에 통증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작가님이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경험이 그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내게 일어난 일 같이 느껴졌다.
다시 말해, 책 속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애써 잊고 외면하며 지냈던 것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니 피가 거꾸로 도는 듯한, 숨 쉬기 버거운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현실을 깨달을 때마다 느끼는 무력감을 견뎌내기란.
마치 중력을 이겨보겠다고 제자리 점프를 반복하는 것 같다.
내 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하는 것과 현존하는 장애물을 마주하고 생겨나는 피해의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것은 이 땅에 태어난 야망 있는 여성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아래는 읽으면서 내게 실질적인 인사이트를 준 문장들이다.
p.40 나는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웠다. 중요한 신차 런칭과 신용카드 런칭, 타사와의 경쟁 PT 등을 연달아 해치우며 본부장은 물론 다른 조직원들을 놀라게 했다. 정신력과 체력을 적절히 안배하는 스킬같은 건 부릴 새도 없이 모든 것을 갈아 넣은 결과였다. 어차피 취약한 인맥 관리보다 그나마 잘하는 일에 올인, 일로서 나를 증명하자는 생각이었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여성조차도 조직 내 끌어주는 인맥 없이는 장기적으로 배제된다는 사실 역시 당시엔 알지 못했다.
=> 실제로 내가 작년 한 해동안 일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 "일로서 나를 증명하자"였다. 그러나 회사생활이라는 게 능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회사 안팎의 경험을 통해서 뼈아프게 깨닫는 중이다.
자의식이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활동을 안정적으로 이어가는 일이다. 고립은 여기에 치명적이다. 고양이 엉덩이 두드리며 집에만 있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장기적, 전략적으로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 여성에게 정치야말로 선택이 아닌 필수다.
취향, 성향이 맞지 않는다고 잘라내면 결국 아무도 주위에 남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심하자. 비위가 약한 여자들은 알아서 고립돼주고 그거야말로 조직이 바라는 바다. 부당함을 넘겨서는 안 되지만 웬만한 다름은 봐 넘기는 관대함이 필요하다.
=> 사내정치의 중요성. 회사생활은 관계가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이 시점의 나에게 정말 유용한 조언이었다.
드라마의 힘은 생각보다 세다.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 50%가 미국 드라마 <X파일>의 주인공 스컬리 덕분에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공계에서 일하지 않는 여성 중에서도 63%가 스컬리 덕분에 과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스컬리 효과'라는 용어까지 나왔다. 지적이고 독립적이고 일에 몰두하는 여성 캐릭터 한 명의 힘이 이 정도다. 우리에겐 더 많은 스컬리가 필요하다.
=> 로맨스 일색인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내가 드라마 작가의 꿈을 힘 있게 밀어붙이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청자들에게 외면받지 않으면서도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창조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겠지만 나아갈 방향인 것만은 분명하다.
p.127-128 하지만 뒷배도 안전망도 없는 '바깥' 생활을 다년간 경험하면서 배운 게 있다. 첫째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외향적, 사교적, 능동적, 긍정적이지 않은 사람은 회사를 관둬선 안 된다는 것과 둘째는 설령 외향적, 사교적, 능동적, 긍정적인 사람이 독립했다 해도 그를 활용한 인맥과 사교만으론 부족하다는 것. 존엄을 지키면서도 확실한 밥줄이 될 수 있는 건 나 자신의 '전문성'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회사는 내가 없어도 돌아가게 마련이다. 스티브 잡스도 대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자기 분야가 있어야 한다.
=>'나는 우리 회사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라는 생각만큼 큰 착각은 없는 것 같다. 스티브 잡스도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쫓겨났으니. 자본주의 사회는 무자비하다. 나는 다행히 이 사실을 비교적 빨리 깨달은 편이어서 당장 내일 잘릴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한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해 새해에도 열심히 달려 나갈 것이다.
왜 통증이 느껴졌나 했더니 잘 먹은 저녁식사가 체한 것이었다.
애써 울렁거리는 속을 붙들고 있다가 시원하게 토해버리니 잠들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해졌다.
책 읽다 체하기는 또 처음이네... 나참.
작년 한 해동안 책을 50권도 못 읽었을만큼 집중력이 떨어져 있었기에
이렇게 단 몇 시간 만에 책 한 권을 해치우는 경험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두께가 얇은 책이지만 예상외로 가볍게 해치울 수 있는 종류의 책은 아니다.
올 한 해 200권의 책을 읽기로 결심한 내게 이 책은 좋은 스타트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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