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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취업 일기 #05. 항상 준비만 하는 미완성의 존재(취준생의 단상들)

일상

by 인간케일 2019.06.06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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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 이것은 되는 것이 없는 무료한 시간이며, 진정한 목적이 없는 기다림, 미래가 사라진 허망함이다.

-『아픔에 대하여』, 헤르베르트 플뤼게

 

1.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오늘 뭐하지?' '뭐부터 해야 하지?'였다. 지난 일기를 넘겨보다보면 거의 매일 이런 고민이 적혀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막막하게 느껴질 때면 일단 다 내려놓고 산책을 나갔다. 밖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들이 정리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유명 작가들도 하루에 한 번은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산책을 하기 위해선 당장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은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말이 그 뜻인 것 같다.

 

2. 나는 어렸을 적부터 빼먹지 많고 실천해온 습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땡볕에 나와 말라죽어가는 지렁이를 나뭇가지에 태워서 풀숲에 넣어주는 일이다. 주로 비오기 전후로 도보에 나와있는 지렁이들을 발견하곤 한다. 어제도 왕지렁이 한 마리를 풀숲에 넣어주었다. 가방에 생수라도 한 병 있었으면 시원하게 뿌려줬을 텐데. 내가 지렁이 입장이 돼보지 않아서 내 행동이 마음에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지렁이들이 이런 식으로 로드킬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3. 내가 자주 이용하는 과일가게에서 참외 33개를 단돈 만원에 샀다. 마감시간이 다 될 때쯤 오천 원어치만 살 생각으로 갔는데 사장님이 세 봉지 만원에 주시겠다고 해서 달라고 했다. 모양은 안 예쁘지만 농장에서 바로 가져온 거라 싱싱하다고 하셨다. 집에 가져와서 먹어보니 정말 달았다. 나는 과일이 비싸다는 말에 절반 정도만 동의한다.

 

4. 과일을 먹고 싶은 만큼 실컷 먹는 방식으로 식사를 때우면 배가 부르면서도 졸리지가 않고 정신이 또렷하다. 난 정말이지 과일을 너무나 사랑한다. 제발 꿀벌이 멸종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5. 요즘 노트북으로 글 쓰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블로그에 글 쓰는 일도 그렇고 원고 알바도 틈틈이 하고 있다. 나는 한번 앉았다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쓰는 편이라 거북목에 대한 염려가 항상 있다. 방에는 24시간 요가매트가 펼쳐져있어서 조금 막힌다 싶으면 누워서 허리를 펴준다. 이렇게 내 리듬대로 작업했다 쉬었다 하는 일이 나에겐 여유고 행복이다.

 

6. 영화 '기생충'을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보지 못했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봉준호 감독이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엔 박찬욱 감독이 좋아졌다. 최근 논란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절감하고 있던 부분이라 영화가 궁금하면서도 보기는 망설여진다. 그래도 스포는 안 당하고 싶다.

 

7. 면덕후답게 하루 한 끼 이상 면 요리를 먹고 있다. 집에서도 해 먹고, 밖에서도 사 먹고.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물냉면파였지만 비건이 되고 나서는 비빔냉면만 먹고 있다. 물냉면은 거의 고기로 낸 육수로 만들기 때문이다. 비빔냉면에도 육수가 약간 부어져 나오는 경우가 있어서 내가 비건식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없다. 얼마 전에는 비빔냉면을 먹고 너무 오랜만에 배가 아파서 육수를 먹었구나 하고 확신했다. 육식할 때 자주 배앓이했던 딱 그 느낌. 조만간 채수로 만든 막국수 집에 가볼 예정이다. 

 

8. 메일 보관함과 SNS 계정을 뒤지다가 옛날에 쓴 글과 읽었던 책에 대한 기록, 사진들을 발견했다. 세상에, 분명히 내가 읽고 쓰고 찍은 것인데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충격이었다. 그보다 오랜만에 마주한 흔적들이 귀엽기도 하고 오그라들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학부 때 쓴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에 관한 리포트는 분명 내가 내 머리로 분석해서 쓴 것인데 잘 못 알아듣겠는 거다. 도대체 어떤 기억은 휘발되고 어떤 기억은 휘발되지 않는 거지?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중요한 사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특히 아프고 힘들었던 기억일수록 블랙아웃 상태다. 모든 순간을 붙잡아 둘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이제라도 부지런히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블로그가 나에게 그런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

 

9. 동생 직장 동료가 안마기를 선물받아왔다. 안마기가 생각보다 그렇게 비싸지 않다는 걸 알았다. 안 그래도 앉아서 이것저것 한다고 어깨가 뭉쳐있었는데 안마기를 대니 엄청 시원했다. 인싸 동생과 사는 덕분에 자발적 아싸 언니는 많은 걸 함께 누리고 있다.

 

10. 홀리데이Holiday의 사전적 정의는 '일을 하지 않고 쉬는 날', '근로 의무가 없는 날'로 보통 주말이나 빨간 날을 의미한다. 직장인에게 홀리데이가 그간의 수고를 보상받는 날이라면 청년 취준생에게 홀리데이는 어떤 의미일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쉽게 '노는' 존재로 분류되는 이들에게 홀리데이란 어떠한 보상도 아닌, 자의와 관계없이 저절로 주어지는 지겨운 나날에 불과하지 않을까. 무한히 주어진 자유에 뒤따를 무한한 책임을 떠올릴 때면 마음만 속절없이 분주하다. 남들 출근하고 일할 시간에 똑같이 공부하고 알바해도 집에선 놀고 있다는 평가를 면치 못하기 일쑤. 무언가 해도 한 게 아니며 어딘가 있어도 있는 게 아닌, 항상 준비만 하는 미완성의 존재, 우린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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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7 16:32 신고
    글을 읽으면서 저의 모습도 오버랩되네요^^
    예전에는 과정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면 코 웃음 쳤었는데
    지금은 그 의미가 무엇인 알겠더라고요
    이 과정들이 합쳐져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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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7 20:30 신고
    저도 게을러 실천을 하지 못하지만
    걸으면서 생각이 정리되고
    정리된 생각을 글로 쓰면
    무의미한 시간들이 체계적으로
    쓰일때가 많습니다(아마 그렇게 하고 계신 것 같기도)
    그리고 이 시대 생존법은 자기만의
    독창적 창의성을 찾으셔서
    희망을 갖고 꾸준히 매진하신다면
    좋은 결과 있을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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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2 21:21 신고
    저도 아직 미완성이예요ㅎㅎ
    끊임없는 자기개발..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제 몸은 지금도 계속 이렇게 살고 있답니다 ^^
    아이러니 하죠..? 생각은 아니라고 하지만
    불안하니까 몸은 반자동적으로 계속 움직이고 또 움직이는